사랑극장

'소설'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6.11.02 여름, 물에 잠기다
  2. 2016.07.19 구로구 할매네
  3. 2016.05.12 뒤틀린 몫
  4. 2016.03.17 내 안의 아이
  5. 2016.03.09 봄날 #1
  6. 2016.03.08 귀뚜라미, 울다
  7. 2016.03.07 싱어
  8. 2016.01.28 마지막 정원
  9. 2016.01.03 솔로몬 그란디
  10. 2012.04.15 창문 (2)

여름, 물에 잠기다

소설 2016.11.02 11:18

 여름, 물에 잠기다.





















                                       






  아내가 계곡 아래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불렀음에도 나는 계속 딴청을 피웠다. 민박집 평상에 앉아 있던 나와 아내와의 거리는 불과 2~3m밖에 되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물소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물속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의 고함소리 때문이었는지 나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척에 있는 여자가 아내인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였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니 어떻게 보면 아내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예전에 알던 여자 같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평상에 앉아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서 저만치 보이는 건너편 숲을 바라보기도 하고, 차가운 계곡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본 것뿐이었다.
  급기야 화가 난 아내가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내 앞에 왔을 때 나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아내는 딸아이가 타고 놀 고무튜브를 가지러 온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게 더위 탓이라 여겼다.
  최근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재앙 같은 폭염에 나는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다. 아까 운전을 해서 이곳에 올 때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비록 구불거리기는 하나, 급격히 가파른 곳은 없었다. 그런데 목적지 방면인 좌측으로 방향을 바꾼 순간, 앞에 직선도로가 갑자기 땅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당황한 나는 뒤차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만 급정거를 했다. 다행히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뒤차 운전사의 재치 때문에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아내와 딸아이가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몰라! 갑자기 도로가 하늘로 치솟았어.”
   나는 아내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되받았다.
  “아니! 한 두 번 가는 길도 아닌데 왜 그래요? 여기서부터는 계속 직선도로잖아. 당신 혹 아까 술 마셨어요?”
  시골로 귀촌한 후 아내는 늘 그런 식이었다. 내게 예기치 않은 상황이 일어날 때나, 가끔씩 부부싸움을 할 때면 그녀는 내가 가끔씩 마시는 술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게 아냐! 오전 내내 하우스에서 일만 했는데 무슨 술?”


  지리산, 중산리 계곡에 밤이 깊어지자 주변은 마치 먹물을 뿌려놓은 듯 컴컴했다. 처서가 지나서 그런지 낮과는 달리 기온은 뚝 떨어졌다. 벌써 귀뚜라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가을이 머지않은 모양이었다. 어제 해질 무렵 만해도 풀을 벨 때 날 괴롭히던 모기들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그래서 속담에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고 했을까.
  아내와 딸아이가 잠자리에 든 뒤, 나는 모처럼 혼자 평상에 앉아 술을 마실 요량으로 배낭을 뒤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아내 몰래 챙겨온 술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술이 없다니…. 나는 당황하여 평상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평상 밑에 빈 병이 두 개 있었다. 얼른 들어서 냄새를 맡아보니 알코올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금방 마신 것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그 평상에는 내가 쭉 있었으므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술을 마신 자는 나밖에 없는 셈이었다.




작가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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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 할매네

소설 2016.07.19 17:20
구로구 할매네

  



  “야야~ 3차 가자! 3차!”

  매서운 12월의 겨울바람 속에 푸른 입김을 쏟아내며 나는 알코올에 흠뻑 젖은 표정으로 평소답지 않게 하늘을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다리가 풀린 듯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반쯤 감긴 눈으로 허공에 의지를 상실해버린 손을 내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온 몸이 살얼음에 쪼이는 듯한 추위를 느꼈고, 정신이 선명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지러운 의식 속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혀버린 나는 얼어버린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나의 팔에 슬며시 팔짱을 끼고서 흐트러짐이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인정이가 환한 웃음을 건넸다.

  “이미 쟤네들은 끝난 것 같은데...... 우리끼리 3차 갈까?”

  그 순간, 내 팔에서부터 서서히 전해지는 인정이의 따스한 온기에 이끌려져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즐겨했던 얼음땡이라는 놀이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이 앙칼스러운 추위로 얼어버린 나에게 불이 되어서 추위를 녹여주는 인정이는, 그렇게 16년 만에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내가 20살이 되었을 무렵에 인터넷의 활성화로 우리 세대에게는 온라인 클럽이 급속도로 퍼졌고,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날 때에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었던 민재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그렇게 나는 1년에 한, 두 번 있는 초등학교 동창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것은 혹시나 했던 나의 마음으로 거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진실했다. 어린 시절에 성숙하고 똑똑하고 예뻤던 내 짝궁, 바로 인정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치에 말이다.

  나는 청소년기를 여느 또래들과 사뭇 다를 바 없이 평범하고 적당하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다만 내 시간 속에서 첫사랑이었던 인정이에 대한 기다림과 설레임 그리고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그 시간이 꿈꾸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민재를 통해서도 다른 여자 동창생을 통해서도 인정이의 안부를 물을 수가 없었고 알 길도 없었다. 하지만 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왠지 모르게 인정이를 곧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렇게 9년을 보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주 갑작스레, 서른을 앞두고서 연말에 준비된 동창회에 깜짝 게스트처럼 인정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물론 어린 시절보다 더 여성스러우며 지적이고 밝은 표정으로 말이다. 바로 어린 시절에 똑 소리 나던 소녀는 어느새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로서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계속



작가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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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몫

소설 2016.05.12 14:11
뒤틀린 몫





바람이 찼다. 봄은 아직 멀었는가. 아침저녁으로 바깥출입을 할 때마다 옷 속을 파고드는 냉기에 멈칫거렸다. 한줌 햇빛이 겨우 들어오는 반지하방. 네 벽면을 장악한 끈질긴 생명력의 검은 곰팡이와 그들이 뿜어내는 숨결로 머리가 수시로 지끈거리며 삶을 마비시키지만 그 방을 벗어날 때마다 머리가 쭈뼛해지는 추위가 더 싫었다. 오래되어 해진 갈색 모직 코트 깃을 세워 조금이라도 늦겨울의 냉기를 막아보려 애를 쓰지만 부르르 몸이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걷다보면 좀 괜찮아 지겠지.’
계단을 막 올라서며 전화벨이 울렸다.
‘아 또.’
멈추지 않는 전화벨소리.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받지마. 받지마. 받지마.’
쉽게 멈추지 않던 벨소리가 멈췄다. 잠시 가벼워진 마음을 역습하듯 다시 울리는 벨소리.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네. 아 그랬어요? 죄송해요. 두 달이나 월급이 밀려서 사정이 그렇게 됐어요. 네 죄송해요. 저 온수 좀. 그렇긴 하죠. 아뇨. 그건 아니고. 네. 월급 들어오면 바로 보낼게요. 네.”
전화를 끊으며 눈부신 빛으로 가득한 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두달치 월세를 밀리는 대신 저축은행 한곳의 빚을 청산했다.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다. 2월의 쨍하게 파란 하늘. 아직은 괜찮다.
‘겨울도 버텼는데’
하루가 간다.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와 식당일을 하고 내일 아침 먹을 것을 얻어 다시 돌아왔다.
지하실 계단에 설치된 전등은 오래전에 전구가 나갔지만 아무도 전구를 갈지 않았다. 집주인이 신경 쓰지 않으니 굳이 내 돈을 들여 전구를 구입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사는 누구도 굳이 전구를 갈아 끼지 않았다.
핸드폰을 켜 계단 아래를 훑어보았다. 어두운 그림자를 끌며 거미줄과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계단은 휑하였다. 핸드폰 빛을 의지해 계단을 내려가 서둘러 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갔다. 철컥 소리가 나게 문을 잠그고 나서야 목안에 가득한 냉기를 훅 뱉어냈다.
집안에 불을 켜기도 전에 곰팡이 냄새가 덮쳐왔다.
‘딸칵’
오래된 백열등이 번쩍번쩍 몇 번의 빛을 뿌리며 어둠을 내쳤다.
‘에휴’
구석구석 빛이 들어오고 나서야 앙금처럼 남아있던 불안이 잦아들었다.
언젠가 백열등이 켜지지 않아 거리의 불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무덤 같은 방에서 밤새 눈을 떴다 감았다 반복하며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밤에 불을 켜고 자는 버릇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밤, 피곤에 지친 육체는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계속





작가 이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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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아이

소설 2016.03.17 10:46
내 안의 아이














                                 






                  
     
                                            
  사각형의 투명 유리로 된 간호사실을 돌면 복도와 연결된 중간 지점에 바깥 풍경이 고스란히 보이는 식당이 있다. 흰 페인트가 엷게 칠해진 철재 탁자 네 개와 의자 수십 개가 놓여 있는 그 곳은 환자들이 밥을 먹는 곳이지만, 그 외의 시간에 나를 비롯한 여러 명이 간간이 담배를 피우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주로 이른 새벽녘 혹은 밤늦은 시간을 이용해 이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병원 규칙상 그 시간에 나오면 안 되지만, 직원들은 그다지 제지를 하지 않는다. 그건 학연과 지연을 중시하는 이 사회의 특수성이 여기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5병동의 주임 간호사는 아내와 대학 동기이고, 보호사 중 유일하게 날 잘 챙기는 김은 고향 후배이다.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새벽 다섯 시에 그 곳에 서 있다. 병원 담을 경계로 안쪽에 심어 놓은 동백이 가로등 불빛과 묘하게 어우러져 염염히 타오르고 있다. 나는 담 너머 밖을 보기 위해, 성에가 두툼히 낀 창을 소매로 닦는다. 내가 그토록 소망하는 바깥세상은 가로등만 희미하게 켜져 있을 뿐, 아직 어눌한 어둠에 쌓여 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시내로 들어가는 첫 마을버스가 올 것이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병원 건너편 가게 앞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웅크린 채로 서 있다. 몹시 추워 보인다. 까만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있다. 허리가 몹시 구부러진 할머니, 행상을 하는 듯 늘 자신의 몸보다 큰 짐을 어깨에 멘 중년의 사내도 있다.
  버스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서서히 들어온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컴컴한 어둠 속에 운전자는 헤드라이트를 켜도 겨우 20~30m 앞만 볼 수 있다. 그 이상은 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흡사 모든 걸 보는 것 같이 앞으로만 질주한다. 무엇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지 아랑곳없이 말이다. 나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더 문다. 속은 타고 있다. 저 마을버스만 탈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하는 허튼 생각으로 마음이 더욱 초조해진다.
  삼년 전,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이곳에 오래 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저 길어야, 아내의 말대로 바깥일들이 조용해지는 대로 몇 개월만 버티면 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아내는 이곳의 내 생활이 보기 좋은지 도무지 꺼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면회도 처음에 몇 번 왔을 뿐, 그 후로는 아예 오지 않는다. 아내의 마지막 말이 기억난다.





작가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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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1

소설 2016.03.09 09:34
봄날

  



  베란다를 통할 수 있도록 거실에 자리 잡은 긴 창문은 햇살의 따사로운 온도를 적당히 조정하고 빛도 적절하게 차단시켜서 자신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쇼파에 기대어 있는 나를 감싸준다. 그렇게 햇살은 시간이 갈수록 하늘 속에 달콤하게 진해지며 노을로 찬란하게 펼쳐지고는 이내 어둑어둑한 수채화를 선사한다. 시간은 태양의 변덕 속에서 하늘의 변신 속에서 정신이 없었지만, 그 안에 나는 공기가 멈춰진 듯이 정지가 되어 있었다. 물론 가끔 긴 창문 틈새로 삐쭉거리며 들어온 바람의 심술로 긴 머리가 이마를 툭하고 치거나 볼을 살짝 건드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나마 긴 창이 까맣게 채워지면 쇼파에 기대어 창문을 바라보던 내가 유일하게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휑하게 넓적한 거실의 벽에 외롭게 내 손길을 기다리던 스위치. 그 스위치는 하루에 딱 두 번, 나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 만들어져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밤이 되면 켜졌다가 잠에 들기 전에 꺼질 때의 딱 두 번. 쿡 하고 소리 없는 인사가 전해지면 스위치는 나의 머리 위에서 햇살만큼은 아니지만 적절한 빛을 내려준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어두운 빛이 약하게 드리워지다가 이내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은 유별날 것도 아니었다. 천장에는 화려한 샹드리에가 있지만 몇 년 전부터 그 아름다운 빛은 늘어진 조각조각에 갇혀졌고, 주방 쪽에 조금 더 가까운 LED 조명의 신세도 피차일반이었다. 그나마 거실 쪽에 가깝게 위치한 LED 조명은 지금껏 내 손길이 닿았던 것이다. 분명 긴 시간을 보내왔음에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유일하게 빛을 건네어 주던 것이 빛을 주지 않는 다는 사실은, 내게 씁쓸한 기운을 남겼다.

  늘 그랬던 것 같다. 관심이라는 것이 전해질수록 돌아오는 것은 배신이었다. 그것은 교통사고를 당해서 뼈가 으스러져 아픈 고통보다 나도 모르게 베어버린 손가락의 작은 상처가 더 쓰라린 것처럼.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가 그럴지도 모른다. 큰 아픔이나 큰 기쁨은 오히려 크게 와 닿지가 않는다. 그건 당연한 것처럼 정해진 기쁨이나 고통이니까. 하지만 작고 사소한, 익숙한 것들에 대한 기쁨이나 아픔은 되려 크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만큼 요즘에는 사소한 것들에게 찾을 기쁨이나 아픔이 적어졌다는 역설인지도 모르겠다. 배타주의보다 더 무서운 이기주의. 그것은 잔인했다. 마치 지구라는 달콤한 과실 속에서 빠져 나가고 있는 과즙처럼 말이다. 풍부한 대지와 맑은 대기를 안은 순수한 자연이 지구라는 과실을 달콤하게 만들어주었다면, 이기라는 기생충적인 병질을 안고서 곳곳에 전염을 시키는 인간들은 과즙을 빼버리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달콤한 과실은 과즙을 모두 잃어버려서 쪼그라들어 썩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은 이기라는 것을 삶 속에서 물들일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일까? 난 무엇인가에 관심을 주고 마음을 건넨다는 것이 두려웠다. 분명 처음과는 또 다른 의미가 되거나 생각이 되어서 내 순수함을 앗아가고 열정을 뭉개고 삶까지 좌지우지 엉키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나부터 변해야했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멀어졌고, 자연을 놓았고, 세상을 등졌다. 세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는 차라리 다행스러운 곳이었다. 어둠에 잠식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면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고, 누구도 묻지 않았기에 어떠한 대답을 할 이유도 생기지 않았다. 문득 눈이 그립다거나 비를 기다리던 적은 있었다. 그들은 빛과 어둠의 양면에도 존재할 수 있는 위대함을 가졌으니까. 그 위대함을 소유하고픈 욕심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살아있는 존재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침몰된 세상이나 물든 시간이나 삼켜진 나까지, 흡수가 되어버린 것처럼 살아있을 수는 없었다.




작가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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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울다

소설 2016.03.08 10:29


  물류센터를 빠져나오자 끊임없이 울리던 기계음들이 물속에 가라앉듯 서서히 지워졌다. 새벽의 도시는 적막했다. 차 한 대 없는 도로 위로는 아련한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았고 신호등은 의미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살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화번호부 속에 수많은 이름들. 나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그 활자 속을 누볐다. 이대로 아무도 없는 그 작은 골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전화번호부를 뒤져보니 부를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아무도 없는 길을 걸었다. 지하철은 끊긴 지 오래였지만 그저 하염없이 역을 향해 걸어갔다. 의식이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언제나 기억이라는 족쇄에 얽매여 있다. 그래서 이렇게 공허한 새벽길을 거닐고 있으면 의식은 자연스럽게 기억의 한순간으로 이끌려간다. 공교롭게도 그것이 좋은 기억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대다수이다. 그리고 나는 하필 영숙이를 떠올렸다. 기억속의 그녀는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느꼈다. 나는 내 손에 꼭 들어오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감쌌고 그녀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감각들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녀가 여전히 내 연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달콤함에 젖어 나는 그 망상 속에서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었다. 파리지옥에 빠져버린 조그만 벌레처럼 나는 무방비상태로 꿈틀댈 뿐이었다. 나의 의식이 완전히 망상 속에 파묻히는 동안 나는 어느덧 역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열었다. 기억 끝에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케케묵은 번호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자 긴 신호음이 이어졌다.

따르르릉... 한 번의 신호음에 소금물을 한 잔 들이켠 것처럼 목이 타들어 갔다.

  따르르릉... 두 번의 신호음에 나는 기대감과 초조함으로 텁텁해진 입술을 세 번 핥았다.
    
     따르르릉... 세 번의 신호음에 전화를 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네 번째 신호음이 울리던 찰나.

  뚝.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후회했다. 그리고 원망했다. 망상에 이끌려 그녀의 번호를 누른 나의 성급함을, 이 새벽의 길을, 은은하게 내려앉은 가로등 불빛을. 결국, 내가 한 말은 여보세요? 였다. 형편없는 첫마디에 자책해보지만 소용없었다. 이윽고 상대편 쪽에서 응 이라는 짧은 대답이 왔다. 하지만 그 짧은 대답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내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알면서도 전화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짧은 대답 속에 작은 떨림, 그것은 당혹감에 약간의 기대감이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나야.”
  그녀의 목소리에 어떤 용기를 얻은 것일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이 시간에?” 
“아..., 그게 그냥...,  새벽에 길을 걷다가..., 그러니까 역에..., 갑자기 너 생각이 났어..., 잘 지내?”
  망상은 그녀를 기억하게 했고, 그립게 했고, 결국에는 그 허구를 현실로 끌어냈다. 그 현실을 지키기 위해 내 입에서 뱉어지는 말 한마디, 작은 숨결 하나까지 신중에 기했다. 하지만 그 신중함은 오히려 독이 되어 혀끝으로 퍼져갔다. 나의 언어들은 조각나고 어긋나버렸다. 그러나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해봤어.”
“뭐라고?”
  그녀는 놀란 듯 말했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
“보고 싶어. 나와 줄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침묵은 거리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손에 땀이 흘렀다. 만약 그녀가 거절한다면 나는 이곳에서 택시를 잡고 집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어디야?”
  순간 들고 있던 휴대폰이 미끄러져 놓칠 뻔했다. 나는 휴대폰을 바로 잡았다.
“뭐 알았다고?”
  놀란 가슴에 재차 확인을 해보았다.
“응, 어디에서 볼까?”
“내가 너희 동네로 갈게. 늦을 수도 있으니까 어..., 거기 있지 우리 자주 가던 데, 거기로 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도로를 살폈다. 역시나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콜택시를 부르며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얼추 5만 원 정도 되는 돈이 주머니에 잡힌다. 이 정도면 택시비로는 충분할 거 같다.





작가 김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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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

소설 2016.03.07 11:34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태리 피렌체의 아침은 언제나 새로운 여행지의 출발 선상처럼 설렘을 안겨준다. 그리고 진한 여운과 그리움을 더해준다.
달칵!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시뇨리아 광장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이 눈앞에 펼쳐졌다. 익숙한 골목의 풍경을 덤덤히 맞이하며 오늘도 이 길을 거닌다. 어젯밤 내린 비로 축축해져버린 거리가 한껏 운치를 더한다. 저 모퉁이만 지나면 잠든 예술가들의 혼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등장할 것이다. 미켈란젤로, 잠볼로냐, 첼리니 더 이상 그들이 낯설지 않다.
피렌체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웠다. 음악 연주가 흐르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석양부터 밤까지 두오모 광장과 아르노강이 펼쳐진 다리 너머의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아름다운 풍경에 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한가로운 오전과 오후 사이 무렵 미켈란젤로 광장에 오르니 주황빛으로 물든 피렌체가 한눈에 보였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을 만큼 파스텔 색조로 펼쳐진 하늘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풍경이 그 어느 대단한 예술가의 예술작품보다도 훌륭했으며 신비로웠다. 문득, 2년 전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이던 그날이 떠올랐다.
   
준세의 발걸음이 산타마리아 노벨라역에서 나와 잠시 숨을 고르듯 멈춰 섰다. 낯설지만 이국적인 경치에 경직 되었던 몸이 눈 녹듯 풀리는 것 같았다. 선선한 바람이 제일 먼저 그를 반기듯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붐비는 군중 속을 뚫고 한발 한발 발걸음을 떼는 그의 시야에 고풍스러운 멋과 낭만이 물씬 풍기는 르네상스 건축물들이 장관처럼 펼쳐졌다. 
준세는 숙소에 짐을 풀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행객들은 넘쳐났고 모두들 저마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준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는 터벅터벅 하염없이 길을 거닐기만 할 뿐, 주위에 이렇다 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조각상과 나란히 사진을 찍거나 관광명소들을 발빠르게 찾아다니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는 딴 세상에서 온 듯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있었다.
우뚝! 그의 발걸음이 어느 한 지점에서 정지되었다. 조토의 종탑과 두오모가 있는 그곳. 그의 맞은편에 어느 한 여인이 발걸음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녀와의 거리차이 열 걸음이 채 되지 않지만 시간이 정지 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감정이 소멸 되었던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굳어 있던 그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가 반응하자 요정의 날개 짓으로 어여쁜 미소를 환하게 지어보이는 그녀. 분명 그녀가 틀림없었다. 준세는 자력에 이끌리듯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떼며 그녀의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놀라워하는 준세를 보며 그녀가 싱긋 웃는다.
“어떻게 알긴요? 저는 아저씨보다 더 아저씨를 잘 알고 있다고요.”
“꼬맹이 너… …정말 맞는 거지……?”
아직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저씨가 그리워하고 있는 저, 맞아요.”
그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와락! 그녀를 한껏 끌어안는 그.
“이제 됐어. 두 번 다시 널 보내지 않을 거야. 절대.”
“진작 그러지. 얼마나 제가 놀랐는지 알아요?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지기나 하고. 아저씨, 미워요.”
“미안해…….”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깐 괜찮아요. 아저씨 보니깐 이제 나도 살 것 같다.”
슬그머니 그녀를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는 그.
“근데 정말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아저씨, 기억 안나요? 우리 피렌체 두오모에 같이 오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저기 큐폴라에 같이 올라가서 사랑을 맹세하기로 했잖아요. 잊은 건 아니죠?”
“잊을 리가.”
“그럼 우리 지금 올라가요.”
“지금?”
“네. 시간이 없어요. 얼른요.”
그녀는 그의 손을 끌고 두오모 안으로 들어갔다. 463개의 계단을 올라 큐폴라에 도착한 두 사람은 탁 트인 전망 앞에 나란히 서며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피렌체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붉은 노을이 하늘에 젖어들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녀가 궁금했던지 그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꼬맹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쉿……. 아저씨 잠깐만요.”
그녀는 멀어져 가는 노을을 조금 더 감상하더니 이내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아쉬워?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아저씨……, 고마워요.”
“뭐가.”
“지금 이 순간 저를 생각해줘서요.”
“난 언제나 너를 생각해.”
“맞아요. 아저씨는 언제나 그럴 거예요.”
준세는 뭔가 이상했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래, 꼬맹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슬퍼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미안해요, 아저씨.”
“미안하다니. 갑자기 왜.”
“비록 저는 이곳에 없지만, 저 역시 언제나 아저씨를 기억하고 생각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곳에 없다니…….”
노을빛의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에 반짝이는 별똥별이 뚝 떨어졌다.
“저를 그리워하는 아저씨의 마음이……, 저를 이곳까지 부른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어보지만 그의 손은 허공만 맴돌 뿐 그녀가 잡히지 않았다. 점점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눈이 어떻게 됐나보다. 뭔가 잘못 됐다. 이럴 수는 없다.
“사랑해요, 아저씨.”
그게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그녀의 모습도, 그녀의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건 모두 거짓말일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
“핼……리. 핼리……야……. 핼리야!”
초점 잃은 눈으로 주위를 더듬어 보지만……, 없다. 그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는다. 불러보고 불러 봐도 대답 없는 그녀를 목 놓아 부르는 한 남자의 절규가 피렌체의 하늘을 적신다. 
 
2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어제 일처럼 선명한 그날의 기억들이 아직도 저릿하다. 준세는 북두칠성 그림이 그려진 어쿠스틱기타를 꺼내들었다.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바람이 잦아들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꺼진 듯 고요해졌다.
  
내가 있는 곳에 네가 있어
네가 있는 곳에도 내가 있을까
우리에게 시간은 더 이상 없는 걸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별을 해야만 했을까






작가 김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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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정원

소설 2016.01.28 10:57





그녀와 만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는데 탭댄스 강사인 그녀는 주말에도 강습이 있었다. 정오 무렵부터 밤까지 연이은 수업에 지친 그녀는 오자마자 내 품에 안겼다. 고개를 들면서는 외식과 드라이브를 미루는 것은 어떤지 의견을 물었다.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와인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품에 안겨 힘없이 미소 짓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전화로 식당 예약을 취소한 후에는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근처에 요기할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려는데 그녀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피곤해서 음식 냄새도 맡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내게 아직도 저녁을 먹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애초에 오늘 저녁은 그녀와 먹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 질문이 어처구니없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점심을 많이 먹었다고 대답하고는 말을 아꼈다.

우리는 근처 주류 가게에서 와인 두 병을 샀다. 기념일 기분을 내기 위해 생크림 케이크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함께 빌라에 들어가던 중 그녀는 자동차에 휴대폰을 두고 왔다며 나를 먼저 올려 보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그녀에게 현관 비밀번호를 물었다. 그녀가 자신의 생년월일이라고 답하는 것을 들으면서는 비밀번호를 무성의하게 설정했다는 생각을 했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외출하기 전에 불 끄는 것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한두 마디 잔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들어가는 동시에, 소파에 앉아있는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소설가 서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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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그란디

소설 2016.01.03 21:04







뒤야.
가끔은 앞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가 대답할 때면 그녀는 씩 웃으며 빈손을 흔들어 보였다.
틀렸어. 앞도 뒤도 아니야.
그녀의 취미는 마임이었다. 실력이 능숙해서, 언뜻 보면 그녀가 정말 동전을 던진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마임에 흥미를 보이자 그녀는 만날 때마다 연습한 마임을 선보였다. 거대하고 무거운 짐을 등에 업으려는 무모한 사람, 맨몸으로 벽을 부수려는 사람, 산 채로 관에 갇혀 공포에 떠는 사람을 연기해 보였다. 그가 마임을 배우고 싶어 해서 그녀는 마임의 기초를 가르쳐주었다. 일단 하나의 사물을 익혀야 해. 나는 맨 처음 사과부터 연습했어. 한 달 내내 사과를 들고 다녔지. 나중에 그녀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일주일이면 되었어. 사과는 일주일만 되어도 물러. 특히나 계속 만지고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재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질감이나 무게를 익히는 것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부재하는 것을 재현해 보이는 거야. 언어가 아니라 몸짓으로.
술에 취한 그녀는 그를 껴안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없을 때 너를 재현해 보고 싶어. 그는 그것이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꾸준히 마임을 연습했다. 그녀를 만날 때에는 예전보다 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훑고 핥고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육체에 대한 감각을 익히려 애썼다. 그러면서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자주 꾸는 꿈이 있어. 자다가 눈을 떠보니 내 옆에 모르는 여자가 돌아누워 있는 거지.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나는 잠자는 여자를 깨우고 괴롭히고 사랑한다고 말해. 그러면서 여자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는데 점을 하나도 살펴볼 수 없는 거야. 소름이 돋았어. 점이 없는 사람이라니, 도저히 그런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 나는, 아, 이 여자는 꿈속의 인물이구나, 생각하면서 잠에서 깰 준비를 해. 나체로 누워있는 여자가 괴물이나 낯선 짐승처럼 징그럽게 느껴졌어. 그녀와 동침하는 상황 자체가 지독한 악몽 같았지. 여자가 깨어서 고개를 돌리기 전에 내가 먼저 일어나야 했어. 너 알고 있어? 네 등에, 오른쪽 엉덩이에, 종아리에 점이 열한 개나 있어. 네 스물세 개의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일 거야. 네 귀 뒤에 있는 점까지 셀 수 있는 남자는 나뿐이야.
그러면 그녀는 키득거리며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자각몽 많이 꾸는데. 최근에는 네 꿈을 꾸었어. 네가 나오지 않는 네 꿈.
그녀가 그와 코를 맞대었다.
일어나 보니까 내 방이었어. 너는 나를 뒤에서 안고 있었지.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언제 왔느냐고 물었어. 기억 못하는구나, 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어. 장난스럽게 내 몸을 더듬는 네 손이 여자 손처럼 부드럽다고 느끼면서 오늘이 공휴일이지만 월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낮잠 중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지. 나는 지금도 네 침대에 누워있지만 너는 내 방 침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도 네 온기가 너무 실제 같아서 서러웠어. 다정한 말을 속삭이던 네 목소리가 점점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변했고 그걸 참을 수가 없어서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어. 이불에는 너의 팔들, 희고 긴 팔들만이 흩어져 있었어.
그는 나지막이 슬픈 꿈이네,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제삼자의 평가, 그러니까 관람객이나 할 수 있는 반응은 아니었는지 반성했다. 뒤늦게 그녀의 침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작가 서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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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소설 2012.04.15 15:35

 

 

창문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 모양의 그 방은 대략 일곱 평 정도 되어 보였다. 문과 마주 보는 벽에는 손을 최대로 뻗어야만 닿을 만한 높이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고 창문 쪽으로 걸어가 위로 손을 뻗어본다. 창문은 생각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여전히 열고 닫기에는 불편했다. 창문은 오래돼서 그런지 한 번에 열리지는 않았다. 먼지 쌓인 창틀을 몇 번이고 흔들고 나서야 창문은 간신히 반쯤 열렸다. 오토바이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창문을 지나간다. 유리창이 한 번 덜컥거렸고 작은 돌덩이 두어 개가 창틀로 떨어졌지만 방 안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창문 바로 밑으로 침대 하나가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자 갑자기 몸이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높낮이 조절장치가 고장난 의자에 모르고 앉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오전에 주인이 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전에 살던 사람이 침대를 놓고 갔는데 아직 깨끗하고 쓸 만하다면서 내게 이만 원을 더 요구한 것이었다. 앉은 채로 침대를 둘러보니 어디 하나 뜯어진 곳 없이 깨끗해 보이긴 했다. 그러나 움직일 때마다 침대 밑에서 나는 스프링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집주인의 말에 따르면 전에 살던 사람은 젊은 여자였는데 그녀가 이사 오고 삼 일 정도 후에 이 침대를 들여놓았다는 것이다. 여자는 딱 육 개월만 살고 나서 이틀 전에 보증금을 입금해달라며 자신의 통장 계좌번호를 남긴 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내가 걸터앉아 있는 이 침대는 구입한 지 육 개월 된 침대라는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잠을 자면 육 개월 된 침대의 스프링이 육 년 된 침대처럼 변할 수 있지?

집주인은 이야기 말미에 육 개월 간 비교적 조용히 잘 살던 여자가 그렇게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된 것이 약간은 이상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상할 것도 없지. 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생각했다. 우선 창문과 오른쪽으로 이웃한 벽의 천장 벽지는 습기 때문에 얼룩져있었다. 그 밑으로 작동이나 제대로 되는지 의심스러운, 한 칸짜리 작은 냉장고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싱크대가 있었다. 싱크대 위에는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바퀴벌레 한 마리가 새로 온 손님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는 듯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바퀴벌레를 보니 조금 전에 집 앞 구멍가게 앞에서 홀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삿짐을 들고오는 나를 쳐다보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 할머니도 나를 그리 반기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 할머니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싱크대 맞은편에는 화장실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 문은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손잡이 위에 해바라기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그 왼쪽에는 목이 반쯤 잘린 미키마우스 스티커도 붙어 있었다. 화장실문 아래쪽이 조금 뜯겨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볼펜으로 씌어진 낙서 흔적이 보였다. 나는 미키마우스 스티커는 조금 있다가 떼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마치 트림하듯이 침대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가 길게 들렸다. 사춘기 시절 부모 몰래 봤던 포르노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주로 엉켜 있던 침대가 이런 소리를 냈다. 머리 위로 어떤 남자가 가래침을 뱉으며 지나간다. 곰팡이 냄새보다는 담배 냄새가 좀 더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에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싱크대 위에서 나를 꼬나보던 바퀴벌레는 그것도 지겨워졌는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구멍가게 앞에 앉아 있던 그 할머니처럼 말도 없이.

나는 피우던 담배를 어떻게 끌까 고민하다가 침대에서 일어나(끼이익) 싱크대로 다가가 그 속에 던져버렸다. 바퀴벌레는 싱크대 구멍에 남아 있던 음식물 찌꺼기 틈에서 허우적대다가 담배꽁초가 날아들자 재빨리 싱크대를 벗어났다. 나는 침대로 돌아와 팔베개를 한 채 누워서(끼이익) 천장을 쳐다보았다. 온몸에 진이 다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이 집에서는 한 달도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고시원으로 들어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나도 고시공부를 하겠노라고, 막 밭일을 마치고 등목을 하려던 아버지 옆에 서서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행여라도 아버지에게 손찌검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내 옆에 서 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습기로 얼룩진 천장에 어른거렸다. 다행히 아버지가 내게 뭘 휘두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날 저녁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고 내려놓았던 숟가락 소리는 여느 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서울로 갈 거냐?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는 물 대신 소주를 한 입 털어 넣으며 물었다. 네. 신림동이요. 나도 안다. 신림동 고시촌. 어머니는 패물을 팔고 대출까지 받았다는 이야기를 차마 못한 채 그저 아버지만을 애타게 쳐다보다가 쟤는 촌구석에서 농사만 짓긴 아까운 애잖아요, 라며 거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라고는, 아버지가 안주로 열무김치를 거칠게 씹던 소리뿐이었다. 두 번은 안 된다. 어림도 없지. 결국, 아버지는 이 말만을 던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나는 안방을 향해 마루에서 큰절을 올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게 바로 이틀 전이었다. 이 집에서 살던 여자가 계좌번호만 남기고 떠나던 바로 그 날. 이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

 

*작가:모희준

 

-계속

*사랑극장(http://www.woorinews.co.kr)에서 모희준 작가의 '창문' 2회 작품을 감상하세요.

‘사랑극장’은 다음, 구글, 네이버, 야후에서 검색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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